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4)
-순식간에 붕괴한 프랑스군의 전선
8월 2일, 프랑스 제2군단이 전선중앙에서 전진해 자르뷔르켄을 점령하고 먼저 기세를 올렸다. 전장을 참관한 아직 어린 황태자에게는 즐거운 선물이 되었겠지만 보급과 조직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나폴레옹 3세가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는 가운데 프랑스군은 취약한 상태로 프로이센군의 반격을 받을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폰 슈타인메츠 지휘하의 프로이센 1군이 프랑스 제2군단에 대해 반격을 개시, 그리고 또한 그 반대편 전선에서 몰트케의 명령에 따라 제2군이 전진을 시작했다. 프랑스 2군단은 속절없이 밀려나 Spicheren-Stierius 일대의 고지에서 프로이센 제1야전군의 맹공을 받아야했다. 32,000의 프랑스군은 굳게 방어선을 갖춘데 대해서 프로이센군은 좁은곳에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키는 실책을 저질렀지만 2배가 넘는 67,000의 병력을 투입하고, 프랑스군 소총 밖에서 퍼부어진 대규모 프로이센 포병대의 맹사로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 측면을 우회해 파고들었다.
견디다 못한 프랑스군이 해질녘 부렵부터 후퇴를 시작, 그동안 그보다 남쪽방면에서 대기중이던 프로이센 제3군도 전진을 시작했다.
8월 4일, 뷔젬부르크(Wissembourg)에서 맥마흔 원수의 프랑스 제1군단 소속의 상대적으로 약한 사단들과 조우한 프로이센 3군은 주저없이 공격을 개시,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삼림이 우거진 언덕을 방패삼아 프랑스군은 맹렬이 저항했지만 프로이센군은 방어선을 돌파, 5만의 병력이 5천에 불과한 프랑스군을 포위해 버렸다.
(Wissembourg전투를 묘사한 프랑스측의 그림이다. Abel Douay준장이 지휘하는 주아브들이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분전중이다.)
(초반 국경에서의 전투상황, 멋모르고 달려들었던 프랑스 2군단은 신나게 깨져나갔다.)
다음날 그런 상황이 프랑스군 최고사령부에 전달되고, 맥마흔 원수는 그가 지휘하는 남쪽방면의 3개군단을 Worth방면에 능선에서 13만의 병력과 100여문의 포병지원을 받는 프로이센군을 45,000 자신의 병력으로 막으려고 시도했다.
Worth전투(독일측 명칭 Battle of Frœschwiller)는 Spicheren방면 전투와 같은 시간에 양군이 격돌하고 있을때 벌어졌다. 프로이센과 바바리아 포병대가 프랑스군에게 맹포격을 가하고, 거침없는 프로이센군의 공격에 절반도 안되는 프랑스군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맥마흔은 급히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병력을 샬롱일대에서 재편하려고 후퇴를 선택했고, 프랑스군 기병대는 이러한 아군이 후퇴할 시간을 벌기위해서 자살적인 돌격을 연거푸 반복했다.
나폴레옹3세는 이 후퇴명령을 승인하며 전군의 샬롱으로의 후퇴도 승인했고, 이는 동프랑스 일대의 상당부분을 포기하는 결정이었다.
무질서한 패주, 특히 중앙의 제2군단은 벌써 메츠방면으로 부리나케 달아나고 있었다. 이 와중에 프랑스군은 다시 메츠야전군과 샬롱야전으로 재편되었지만 전선은 더욱 혼란에 빠져 총체적 붕괴가 이어지고 있었다.
발트해로의 야무진 꿈에 젖어있던 원정은 취소되고, 수병과 해병들은 하선해서 파리일대에 혹시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동원되었다. 국민병들 역시 소집되고 있었고, 성급한 혁명주의자들은 파리 곳곳에서 공화정에 관한 논의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8월 7일부터 갑자기 폭우가 시작되었고, 이는 후퇴하는 프랑스군이나 전진하는 독일군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독일군은 제1야전군과 제2야전군은 전진을 멈추고 전열을 가다듬으며 기병정찰에 진력했다.
이에 반하여 제3군은 맥마흔군을 맹렬히 추격중이었다. 이 와중에 일시적으로 제1,2군과 2군이 보주(Vosges)산맥에서 연결이 단절되기도 했다. 연결자체는 회복되었지만 보주산맥의 프랑스군의 요새중 Phalsbourg요새는 12월 12일, Bitsch요새는 이듬해 3월 26일까지 바바리아군에 공략당할때까지 항전하며 프랑스군의 자존심을 그나마 살리기도 했다.
제3군이 8월 14일 스트라스부르크 남쪽방면을 포위했지만 철도보급등이 여의치 않았기에 몰트케는 제3군이 어떻게든 현지징발로 버티라고 요구했다.
그 이전인 8월 12일에는 메츠야전군 사령관 바전원수가 모젤강을 건너 자신의 군을 재편하려고 시도하려는걸 나폴레옹3세에게 승인받았다. 3개군단고 근위대가 계속 메츠에서 버티고 있었고 깡로베르 원수도 6군단을 이끌고 샬롱방면으로부터 합류(다만 포병,공병장비는 거의 상실)했고 나폴레옹 3세도 아직 떠나기를 거부하고 여전히 근위대의 지휘를 겸해 이것저것 원수들에게 간섭하고 있었다.
한편 가교가 부설된 모젤강 일대는 비로인해 불어난 유량에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조직력을 상실한 프랑스군의 패주가 이어졌다. 8월 14일까지 반수의 프랑스군이 7개의 다리를 통해 진창길을 따라 철수하는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맥마흔군을 제3군이 악착같이 따라붙어 공격해대고 있었고 모젤강을 경계로 새 전선이 구성되어 8월 14일 오후에는 프로이센 7군단이 모젤강 동쪽에 남아있던 프랑스군 병력들을 소탕했고, 15일에는 다음 주요 요새인 베르덩 일대로 30마일 정도를 후퇴하려는 바젠의 메츠야전군을 상대로 몰트케의 명령에 따라 전열을 정비중이던 프로이센 제2군이 뫼즈강을 도하해 베르덩-메츠간 가도를 탈취하려고 시도했다.
8월 15일, 드디어 폭우가 멈추고, 2,6군단과 근위대가 메츠 서쪽에서 야영하는 사이, 3,4군단은 북서쪽을 통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10마일 정도밖에 행군하지 못한 사이에 프로이센 2군은 신속한 기동으로 이들을 따라잡아 프랑스군 행군대열 측면을 후려갈겼다.
8월 16일, 프랑스군의 고참병들은 '맥시코에서보다도 뜨거웠던 하루'라고 기억하는 날이 되었다. 양군이 치고박는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고, 결국 질려버린 나폴레옹3세는 마침내 메츠야전군을 내버리고 철도로 샬롱으로 향했다. 바젠에게는 베르덩으로 최대한으로 신속하게 후퇴하라는 명령을 남기긴 했지만 이 명령의 실현가능성은 바젠이 보기에는 거의 없었다.
바젠은 황제가 떠나기가 무섭게 기병정찰을 시행해서 아직 자신의 남쪽방면에는 적이 없으며 2군단과 6군단의 마지막 부대가 숙영지에 합류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머지 부대들의 행군을 중지시키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남쪽방면에 적이 없다는 기병대의 보고는 잘못된 것으로, 프로이센 기병대는 이미 메츠야전군 남쪽방면에 등장, 6군단을 견제하다가 2군단을 향해서 프로이센 기병사단의 기병포가 불을뿜기 시작했고 바젠은 결국 결전을 결심할수밖에 없었다.

(메츠일대의 상황, 과연 바젠은 어느쪽을 택할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