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렸어;; 이젠 꿈도 희망도 없어

;;;양현종이 2회에 강판당하고 어제 시원시원하게 던지던 안영명이 안타 처맞고;;;

이대로 두산전까지 18연패 타이기록 찍고 한화전에서 류현진이 뜬다면;;;

by 뚱보소좌 | 2010/07/04 18:01 | ▶잡솔...◀ | 트랙백 | 덧글(0)

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5)

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5)

-기적을 창조한 기병돌격

프로이센 3군단 군단장 콘스탄틴 폰 알벤슬레벤(Alvensleben) 소장은 프랑스군 후위의 서진을 막고자 시도했다.

바젠은 직접적으로 베르덩으로 가는 루트는 프로이센군에 봉쇄되었고, 메츠일대에서 남쪽으로도 프로이센군 주력이 접근해 오고 있다고 판단했다. 정오가 되자 프로이센군 10군단 병력들이 전장에 도착해 프랑스군을 상대로 전투를 개시했다. 하지만 그들의 병력은 물과 3만 남짓으로, 프랑스군에 비해서 1/4도 안되는 규모였다.

파리를 등진 프로이센군과 국경을 등진 프랑스 대군이 격돌하고, 프로이센군에게는 그날따라 악재가 겹쳐서 제2야전군 주력마저 행군방향을 잘못잡고 길을 헤매고 있었다. 누가봐도 그동안 패배를 이어온 프랑스군이 프로이센군을 밟아버릴 절호의 설욕기회였다.

바젠은 3군단과 6군단이 남서쪽 방향으로 프로이센군을 포위해 밀어붙이려고 시도했고, 자신이 직접 선두에서 싸우며 2군단과 근위대로 프로이센군 증원병력의 투입도 적절히 봉쇄하고 있었다.

연거푸 돌격을 반복했지만 그때마다 프로이센군의 공격에서 점점 예기가 사라져가고, 중앙일대의 버온빌,르존빌 일대에 돌격을 계속했지만 점점 상황은 프로이센군에게 절망적으로 다가왔다.

마침내 오후가 되어 탄약마저 떨어져가고, 증원군마저 멀리서 우왕좌왕하고 있을때 알벤슬레벤 소장은 프랑스군이 그랬듯이 기병대를 돌격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이 기병돌격은 이후 유럽 군사사에서 마지막 기병의 대승리중 하나로 기록되게 된다.

그는 휘하의 예비여단의 2개 중기병연대를 차출해서 프랑스군 중앙의 깡로베르 원수의 프랑스 6군단 일대에 돌격시켰다. 이들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이들의 용감한 돌격은 프랑스군을 큰 혼란에 빠트렸고, 혼전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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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중인 프로이센 중기병들... 프랑스군 기병들과 달리 이들은 결국 기적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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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프리 시리즈에 묘사된 프로이센 중기병들)


몰트케,비스마르크,빌헬름1세도 휘하 참모들을 대동하고 전장에 있었고, 비스마르크는 전투중 이 기병돌격에 참가했던 아들 허베르트(Herbert)가 부상당하자 전투가 끝날때까지 전사한줄 알았고, 빌헬름1세가 타고있던 말마저 총에 맞을 정도의 대 혼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돌격은 결국 프로이센군 주력이 증원될 시간을 벌어주어 저녁무렵 전장의 프로이센군은 9만5천까지 증원되어 있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바젠은 근위대를 예비대로 배치하고 메츠방면으로 물러나 재정비를 시도했다. 그렇게 프랑스군이 물러나는 사이에 제1야전군의 7,8군단을 속속 증원받은 프로이센군은 23만의 대군이 프랑스군이 물러난 St-Privat방면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St-Privat전투는 생략하겠습니다... 방학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따로 비중을 두고 쓰고자 합니다.)

-St-Privat전투 생략-

프랑스 주력군이 메츠요새에 틀어박혀 포위당하고, 누가 봐도 이 전투는 프로이센군의 승리였다.

그러나 아직 전쟁이 끝난건 아니었다. 8월 19일, 몰트케는 프랑스 영내에서의 전쟁의 다음 국면을 시작했다. 제1군에 일부 2군 병력을 배속시켜 프랑스군이 농성중인 메츠를 포위하게 하고(병력 17만, 지휘관 프로이센 왕세자 프리드리히 카를),제2군에서 일부 병력을 차출해서 신편 제4군을 편성했다. 병력은 86,000명 규모로 지휘관은 작센 왕세자(Crown Prince) 알베르트(Albert)공, 병력구성은 작센군 12군단과 4군단, 프로이센 근위대 등이었다.

8월 20일까지 새 편제를 정리한 프로이센군은 신편 제4군(뫼즈 야전군이라 칭함),이 제3군과 함께 뫼즈강 서안으로의 진격을 개시했다.이에 대응하는 프랑스 샬롱 야전군에는 1,5군단과 7군단, 그 이외의 주력병력 밖에도 신편12군단(수병,해병,갓 소집된 신병들로 구성된 급조군단), 2개 기병사단의 병력에 5백문의 포와 미트라예즈 제사총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달아나던 나폴레옹 3세는 퇴위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실상 파리의 황후와 전쟁성 장관등과 함께 계속 전장에서 야전군 지휘관들에게 간섭하고 있었다.

맥마흔(불어식 발음에 관해서 태클이 들어왔습니다만 일단 썼으니 끝장을 보겠습니다...)군은 사기가 최악에 달해 있었지만 파리로의 퇴각은 군사적으로는 안전할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프랑스의 패배이자 제정붕괴와 혁명을 불러 일으킬게 틀림없는 일이었기에 나폴레옹3세는 꼭 피하고 싶었다.

그는 맥마흔군이 포위된 메츠와 연결되어 바젠군을 구원하기를 바랬다. 하지만 이미 프랑스 제2제정은 끝을 보이고 있었고, 공화정이 태동되고 있는것이나 다름없는 가운데, 거기에 전황을 재기불능으로 만든 결정적인 사태가 8월 21일 발생했다. 샬롱야전군이 아직 북서방향으로 이동중에 야영을 하다가 급작스럽게 나타난 프로이센의 야전군 2개에 포위당해 버린 것이다.

사기도 낮고 장비고 부족한데다 기타 식량,피복류도 행군에 필요한 양 이상은 모두 소각해 버린지라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샬롱야전군 주력은 22일까지 복동방향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Bheims에 머물렀다. 다행히 현지와 철도에서 보급품을 찾아내는데 성공했지만 프로이센군이 역시 베르덩으로 가는 루트를 틀어막았고, 하는수없이 맥마흔은 쏟아지는 여름비를 맞으며 Monmedy방향으로 행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바젠과 맥마흔의 군대는 서로 연결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실제로 바젠도 메츠에서 포위를 풀려고 2차례정도 시도했다. 처음 시도는 8월 22일 북동방향으로 시도하다가 폭우로 취소하였고, 2번째 시도는 31일 새벽을 틈타 동쪽으로 기습을 가해보았지만 프랑스군 3,500에 프로이센군 2,500의 사상자만을 내고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몰트케는 맥마흔군은 2개 야전군을 이용해 벨기에 국경방향으로 도망칠수 없게 교묘히 궁지로 몰아넣었고, 3군과 4군에 의해 형성된 포위망 속에서 맥마흔은 황제와 파리로부터 바젠군과의 합류를 독총당했지만 이미 뮤즈강의 교각과 몽메디 일대의 도로는 모두 프로이센군의 손에 있었고, 프로이센 기병들은 악착같이 행군중인 프랑스군에게 기습을 가하며 안그래도 폭우로 인해 진창으로 변한 길에서 프랑스군들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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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大)몰트케, 19세기 중후반의 유럽 최고의 명장)



그렇게 우왕좌왕하면서 괴롭게 프로이센 기병들과 교전하고 진창길을 뚫으며 프랑스 병사들은 점차 지휘관들에 대한 신뢰감을 잃고 그들을 멸시하게 된 가운데 점차 벨기에 국경으로부터 11km가 떨어진 세당(Sedan)이라는 곳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토요일날 낙뢰로 모뎀이 나가고 인터넷 익스플로러 업데이트 문제등이 겹쳐서 오늘에야 연재를 하게 됐습니다... 번역이나 편집작업 자체는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이루어지는데... 올릴 방법이 없으니...)

by 뚱보소좌 | 2008/07/16 00:03 | ▶전쟁사◀ | 트랙백 | 덧글(0)

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4)

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4)


-순식간에 붕괴한 프랑스군의 전선

 8월 2일, 프랑스 제2군단이 전선중앙에서 전진해 자르뷔르켄을 점령하고 먼저 기세를 올렸다. 전장을 참관한 아직 어린 황태자에게는 즐거운 선물이 되었겠지만 보급과 조직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나폴레옹 3세가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는 가운데 프랑스군은 취약한 상태로 프로이센군의 반격을 받을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폰 슈타인메츠 지휘하의 프로이센 1군이 프랑스 제2군단에 대해 반격을 개시, 그리고 또한 그 반대편 전선에서 몰트케의 명령에 따라 제2군이 전진을 시작했다. 프랑스 2군단은 속절없이 밀려나 Spicheren-Stierius 일대의 고지에서 프로이센 제1야전군의 맹공을 받아야했다. 32,000의 프랑스군은 굳게 방어선을 갖춘데 대해서 프로이센군은 좁은곳에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키는 실책을 저질렀지만 2배가 넘는 67,000의 병력을 투입하고, 프랑스군 소총 밖에서 퍼부어진 대규모 프로이센 포병대의 맹사로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 측면을 우회해 파고들었다.

 견디다 못한 프랑스군이 해질녘 부렵부터 후퇴를 시작, 그동안 그보다 남쪽방면에서 대기중이던 프로이센 제3군도 전진을 시작했다.

 8월 4일, 뷔젬부르크(Wissembourg)에서 맥마흔 원수의 프랑스 제1군단 소속의 상대적으로 약한 사단들과 조우한 프로이센 3군은 주저없이 공격을 개시,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삼림이 우거진 언덕을 방패삼아 프랑스군은 맹렬이 저항했지만 프로이센군은 방어선을 돌파, 5만의 병력이 5천에 불과한 프랑스군을 포위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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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ssembourg전투를 묘사한 프랑스측의 그림이다. Abel Douay준장이 지휘하는 주아브들이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분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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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국경에서의 전투상황, 멋모르고 달려들었던 프랑스 2군단은 신나게 깨져나갔다.)

 다음날 그런 상황이 프랑스군 최고사령부에 전달되고, 맥마흔 원수는 그가 지휘하는 남쪽방면의 3개군단을 Worth방면에 능선에서 13만의 병력과 100여문의 포병지원을 받는 프로이센군을 45,000 자신의 병력으로 막으려고 시도했다.

 Worth전투(독일측 명칭 Battle of Frœschwiller)는 Spicheren방면 전투와 같은 시간에 양군이 격돌하고 있을때 벌어졌다. 프로이센과 바바리아 포병대가 프랑스군에게 맹포격을 가하고, 거침없는 프로이센군의 공격에 절반도 안되는 프랑스군은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맥마흔은 급히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병력을 샬롱일대에서 재편하려고 후퇴를 선택했고, 프랑스군 기병대는 이러한 아군이 후퇴할 시간을 벌기위해서 자살적인 돌격을 연거푸 반복했다.

 나폴레옹3세는 이 후퇴명령을 승인하며 전군의 샬롱으로의 후퇴도 승인했고, 이는 동프랑스 일대의 상당부분을 포기하는 결정이었다.

 무질서한 패주, 특히 중앙의 제2군단은 벌써 메츠방면으로 부리나케 달아나고 있었다. 이 와중에 프랑스군은 다시 메츠야전군과 샬롱야전으로 재편되었지만 전선은 더욱 혼란에 빠져 총체적 붕괴가 이어지고 있었다.

 발트해로의 야무진 꿈에 젖어있던 원정은 취소되고, 수병과 해병들은 하선해서 파리일대에 혹시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동원되었다. 국민병들 역시 소집되고 있었고, 성급한 혁명주의자들은 파리 곳곳에서 공화정에 관한 논의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8월 7일부터 갑자기 폭우가 시작되었고, 이는 후퇴하는 프랑스군이나 전진하는 독일군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특히 독일군은 제1야전군과 제2야전군은 전진을 멈추고 전열을 가다듬으며 기병정찰에 진력했다.

 이에 반하여 제3군은 맥마흔군을 맹렬히 추격중이었다. 이 와중에 일시적으로 제1,2군과 2군이 보주(Vosges)산맥에서 연결이 단절되기도 했다. 연결자체는 회복되었지만 보주산맥의 프랑스군의 요새중 Phalsbourg요새는 12월 12일, Bitsch요새는 이듬해 3월 26일까지 바바리아군에 공략당할때까지 항전하며 프랑스군의 자존심을 그나마 살리기도 했다.

 제3군이 8월 14일 스트라스부르크 남쪽방면을 포위했지만 철도보급등이 여의치 않았기에 몰트케는 제3군이 어떻게든 현지징발로 버티라고 요구했다.

 그 이전인 8월 12일에는 메츠야전군 사령관 바전원수가 모젤강을 건너 자신의 군을 재편하려고 시도하려는걸 나폴레옹3세에게 승인받았다. 3개군단고 근위대가 계속 메츠에서 버티고 있었고 깡로베르 원수도 6군단을 이끌고 샬롱방면으로부터 합류(다만 포병,공병장비는 거의 상실)했고 나폴레옹 3세도 아직 떠나기를 거부하고 여전히 근위대의 지휘를 겸해 이것저것 원수들에게 간섭하고 있었다.

 한편 가교가 부설된 모젤강 일대는 비로인해 불어난 유량에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조직력을 상실한 프랑스군의 패주가 이어졌다. 8월 14일까지 반수의 프랑스군이 7개의 다리를 통해 진창길을 따라 철수하는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맥마흔군을 제3군이 악착같이 따라붙어 공격해대고 있었고 모젤강을 경계로 새 전선이 구성되어 8월 14일 오후에는 프로이센 7군단이 모젤강 동쪽에 남아있던 프랑스군 병력들을 소탕했고, 15일에는 다음 주요 요새인 베르덩 일대로 30마일 정도를 후퇴하려는 바젠의 메츠야전군을 상대로 몰트케의 명령에 따라 전열을 정비중이던 프로이센 제2군이 뫼즈강을 도하해 베르덩-메츠간 가도를 탈취하려고 시도했다.

 8월 15일, 드디어 폭우가 멈추고, 2,6군단과 근위대가 메츠 서쪽에서 야영하는 사이, 3,4군단은 북서쪽을 통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10마일 정도밖에 행군하지 못한 사이에 프로이센 2군은 신속한 기동으로 이들을 따라잡아 프랑스군 행군대열 측면을 후려갈겼다.

 8월 16일, 프랑스군의 고참병들은 '맥시코에서보다도 뜨거웠던 하루'라고 기억하는 날이 되었다. 양군이 치고박는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고, 결국 질려버린 나폴레옹3세는 마침내 메츠야전군을 내버리고 철도로 샬롱으로 향했다. 바젠에게는 베르덩으로 최대한으로 신속하게 후퇴하라는 명령을 남기긴 했지만 이 명령의 실현가능성은 바젠이 보기에는 거의 없었다.

 바젠은 황제가 떠나기가 무섭게 기병정찰을 시행해서 아직 자신의 남쪽방면에는 적이 없으며 2군단과 6군단의 마지막 부대가 숙영지에 합류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머지 부대들의 행군을 중지시키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남쪽방면에 적이 없다는 기병대의 보고는 잘못된 것으로, 프로이센 기병대는 이미 메츠야전군 남쪽방면에 등장, 6군단을 견제하다가 2군단을 향해서 프로이센 기병사단의 기병포가 불을뿜기 시작했고 바젠은 결국 결전을 결심할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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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츠일대의 상황, 과연 바젠은 어느쪽을 택할것인가?)

by 뚱보소좌 | 2008/07/10 23:59 | ▶전쟁사◀ | 트랙백 | 덧글(0)

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2)


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2)


-양군의 준비태세

 프랑스로서는 1차적으로 전선이 독일 접경인 알자스와 로렌 일대가 될수밖에 없다고 판단, 당장 가용가능한 병력은 독일연합군보다 적지만 이곳에서 방어태세를 갖추는것이 프랑스측의 주요 승리방법이었다.

 사실 아직 프랑스는 전쟁자체가 즉흥적으로 결정된지라 군사적 행동을 취할만한 준비가 완벽하지 않않은 상태에서 프로이센에 비해서 전쟁계획도 세부적이지 못했다. 이전의 전쟁들과 다르게 몰트케는 대규모 병력을 전선으로 급히 수송해야 할것을 예측하고 전쟁 전부터 이미 물자를 전선 일대에 비축해두고 있었다.

 그가 예상한 최악의 경우는 이러한 준비가 끝나기 이전인 7월 25일 이전에 프랑스가 15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해 독일국경을 넘는 것이었따. 그는 8월 1일까지 프랑스가 공격하지 않을경우 순조롭게 방어전을 치르는게 가능하고, 8월 4일까지 아무 행동이 없을 경우 무난히 공세가 가능할 것이라 판단했다.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장군들에게는 3가지 해결해야할 군사적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철도 종착역 이후로부터 이어져야 하는 보급이었다. 양국 모두 대군을 운용했고, 병력과 군마들 모두 탄약뿐만 아니라 대량의 식량과 물까지 필요했다. 두번째로 지휘관의 수에 비해서 예하제대가 너무 많아서 효율적인 지휘가 불가능했고, 마지막은 날로 증가하는 포병과 보병화력에 의한 사상률의 증가였다.

 프랑스는 이미 1859년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철도를 이용해 병력을 전선으로 급파해본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참모본부가 전시 철도운용에 대한 세부계획이 전무했고, 종점 이후에는 여전히 그들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루에 10마일(16km)씩 도보로 행군해야 했다.

 나폴레옹1세때부터 프랑스군은 전통적으로 군단이 행군시에는 분산되어 기동하며 보급의 부담을 줄이며, 중간중간의 보급거점과 현지에서 보급을 해결하는(결론은 징발이나 약탈) 방식을 택해왔다. 그리고 이것은 몰트케에게 큰 호재로 작용할 것이었다.

 프로이센측은 클라우제비츠 이후로 기동전과 병력의 집중을 신조로 삼아왔고, 몰트케는 병력을 분산시켜 행군시키는 프랑스군의 특성을 이용해 프랑스의 각 군단을 분산시켜 포위해 '섬멸전'을 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양측의 보병화력은 니들건을 사용하는 프로이센-독일군이나 샤스포(Chassepot)소총을 사용하는 프랑스군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프랑스군이 근소하게 우세하다고 볼수도 있었다. 하지만 포병에 있어서 1866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포병과 상대해본 프로이센군은 크루프사에서 개발된 신형 강철제 후장포를 장비하고 있었고, 이에 반해서 프랑스 포병은 여전히 구태의연하게 청동주조제의 전장포를 대규모로 운용했다.

 기병은 양측 모두에게서 낮게 평가되는 경향이 많았고 당시에도 20년 내로 사라질 병종으로 보고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찰등에서 유용한 존재였고, 이는 상위제대로 갈수록 그 정도가 심했다. 또한 1866년 전쟁의 경험으로 이들이 패주하는 적의 추격에는 유용한 존재라고 몰트케는 판단하고 있었다.

 프로이센 참모본부는 1869년-70년 기간에 걸쳐 3개 야전군을 라인강과 코블렌츠 북쪽, 칼스루헤 남쪽일대에 배치시키고, 팔츠등을 통해 프랑스군을 노릴 준비를 갖추었다. 프로이센군은 연대를 편성지역에 따라 근거를 두고 대대는 Parish에 근거를 두고 편성하는 향토근거의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었고, 프로이센군은 성공적으로 기동전 명령을 이행 개전 18일만에 란트베어를 포함 1,183,000명을 동원해(어지간한 당시 유럽 대도시 인구 수준의 병력) 그 중에서 462,000의 병력이 1선에 배치되었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프랑스 영내로 진입한 독일군 병력은 85만이었다.

 7월 말까지 프랑스군은 소규모 기병정찰 외에는 행동이 없었다. 프로이센군은 1군(65,000)을 Wadern 인근에, 2군(174,000)을 Neunkirken 인근에, 3군(141,000)을 란다우(Landau)인근에 배치하며 국왕 빌헬름1세는 총사령부와 합류 7월 31일 마인츠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몰트케는 제2군이 중앙의 자그부르켄 방면으로 전진, 1군이 그 북쪽을 따라 전진하고, 3군이 스트라스부르크 방면으로 진격할 심산이었다. 2군이 프랑스군을 밀어붙이면 그 양익을 나머지 야전군이 측면에서 받쳐준다는 것이 프로이센군의 계획이었다.

 그 동안에 프랑스군은 역시 3개 야전군으로 나뉘어 알자스 야전군(Army of Alsace)을 맥마흔 원수가, 로렌야전군(Army of Lorraine)은 메츠에서 바젠 원수의 지휘하에 주둔해 있었고, 샬롱야전군(Army of Chalons)은 깡로베르 원수의 지휘하에 있었다.

 나폴레옹3세는 이중 샬롱야전군을 제외한 나머지 2개 야전군을 합하여 라인야전군(Army of the Rhine)으로 재편하고 3명의 원수들에게 각각 7개의 군단을 나누어 지휘토록 했다.(튀는 사람없이 무공은 자신이 가질수 있도록 -_-;;;)

 
 하지만 이러한 군 전투서열 변화는 큰 혼란을 야기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예비역 소집,보급조차 충분하지 못했다. 거기에 프랑스 주력인 라인 야전군은 구릉성 지형때문에 3개군단과 근위대가 북쪽, 남쪽에 나머지 3개군단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런 심란한 상황의 와중에 나폴레옹 3세는 7월 28일 메츠에서 황태자, 전쟁성 장관인 르뵈프 원수등과 참모들을 대동하고 도착, 독일군에 맞설 준비를 갖추었(을까?)

 

by 뚱보소좌 | 2008/07/10 05:37 | ▶전쟁사◀ | 트랙백 | 덧글(0)

The Franco-Prussian war 1870-1871(2)

이미지를


(프로이센의 3인방, 좌측부터 몰트케,빌헬름1세,비스마르크이다.)


-외교의 달인, 칼을 뽑아들고 유럽을 요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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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최고의 모사? 프로이센 수상 Otto von Bismarck)


프로이센 수상으로 취임한 비스마르크는 독일이 이런식으로 힘을 증강시켜 나갈경우 필연적으로 프랑스와 충돌하게 될것을 예상했다. 그리고 프로이센보다 좀 더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독일 남부지역, 특히 카톨릭을 신봉하는 바바리아와 기타 바덴,뷔르템베르크등의 통일등에 있어 그를 위해서도 프랑스를 격파하면서도 독일 자체의 이미지에는 손상을 가하지 않을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고 이에 있어서 비스마르크는 어떠한 방법을 사용함에도 주저가 없었고, 또한 그에게는 그것을 받쳐줄 몰트케의 전략과 군대가 있었다.

이에 반해서 나폴레옹 3세와 제2제국정부는 공식적으로 평화를 표명했지만 내심 1815년 비엔나회담 이후 프랑스에 가해진 금제를 폐기하고, 프랑스의 영광을 만천하에 떨치기를 바랬으며, 프로이센군을 얕보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룩셈부르크 대공국(군사적으로 프로이센군 주둔중, 형식상으로는 네덜란드 왕실의 영토), 프러시아와 바바리아의 영토 일부를 프랑스에 합병시켜 주겠다는 애매한 약속을 나폴레옹 3세에게 했던 비스마르크는 이 정보를 고의로 흘려보냄으로서 이 지역들에서의 대 프로이센 반감을 고취시키면서 동시에 1867년 영국과 런던에서 협상을 벌여 룩셈부르크의 중립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이러한 일연의 외교적 사건들은 마침 동시기 멕시코 제국의 붕괴와 함께 나폴레옹 정권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868년 스페인에서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스페인 군주였던 이사벨라2세(Queen Isabella II)가 명예혁명으로 축출되어 프랑스로 망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스페인 민중들은 좀 더 자유주의 성향의 군주와 정권을 원했고, 이들은 호엔촐레른(Hohenzollern) 왕가의 레오폴트(Leopold)공을 새로운 그들의 왕으로 추대하길 원했다.

레오폴트공은 아버지 카론 안톤 대공은 비스마르크 이전의 프로이센 수상, 그의 아내는 포루투갈의 공주였고, 형제중 한사람은 루마니아 왕위에 오르기도 한 인물이었다.

이럴 동안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사이를 중재하며 동맹국들을 얻으려 노력하면서 또한 스페인에 친 독일적 정부가 들어서는걸 여러가지 공작으로 막기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에 1870년 4월, 레오폴트 대공에게 헌납된 스페인 왕관을 당시 호엔촐레른의 당주였던 빌헬름1세가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프랑스의 반대공작이 더해져 레오폴트 대공은 결국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비스마르크는 교묘하게 프랑스와의 대결구도로 이어나가는데 성공했다.

5월, 프랑스에서는 스페인에서의 기분좋은 소식과 함께 자유주의 내각이 선거에서 압승하면서 나폴레옹3세의 '자유제정'은 힘을 얻고 있었고, 그에 맞춰 프랑스 내에서의 프로이센에 대한 경각심은 바닥에 떨어져 있을때 비스마르크는 행동에 나서고 있었다.

6월 9일, 프랑스 대사 빈센트 베네디티 백작(Count Vincente Benedetti)이 팔츠의 온천도시인 엠스(Ems)에서 휴양중이던 빌헬름1세를 방문했다. 여러차례의 회동이 있었고, 이 와중에 프랑스 대사는 이후에도 호엔촐레른 왕가의 인물이 스페인 왕위를 이어받지 않을것이다는 확약을 본국에 전해도 좋겠냐고 빌헬름1세에게 요청해왔다.

이에 빌헬름 1세는 6월 13일 아침 마지막 만나는 자리에서 이 이야기에 대한 확답을 거부하고 그를 조용히 돌려보냈다.

이 사실이 전보로 베를린의 비스마르크에게 전달되자 그는 전쟁성에서 총참모장 몰트케와 전쟁성 장관 론 장군등을 불러 이후의 행보를 의논하고 연방의회등에 마지막 13일에 있었던 회동의 결과를 상세히 덧붙여, 특히 프랑스 대사의 요청을 강요로 바꾸어 발표하는 행동을 저질렀다.

마침 6월 14일 바스티유 습격을 기념해서 파리 시내에서 군대가 퍼레이드를 벌이던중 각국 언론에 이 사실이 발표되자 당장 프랑스 여론이 들끓었고, 바로 다음날 프랑스 의회가 대 프로이센전에 대비한 예산안을 가결시키고, 나폴레옹3세는 예비역 소집령을 전국에 선포했다. 또한 이에 이어 전쟁성 장관 에드몽 르뵈프(Edmond Leboeuf) 원수는 '각반의 단추만 채우면 모든것이 끝난다'라는 말로 여론을 호도하며 프랑스 의회는 결국 245대10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대 프로이센 선전포고를 가결시켰다.

그리고 이 소식이 전해지기를 마치 기다렸다는듯 프로이센은 당장 몰트케의 주도아래 전략플랜을 발동시키며 6월 19일 정식으로 양국은 전쟁에 돌입했다.

이미지를

 

(유제니 황후, 나폴레옹3세의 황비였다... 올린 이유는 그냥 이뻐서...)

by 뚱보소좌 | 2008/07/08 23:56 | ▶전쟁사◀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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